도화살은 정말 바람기입니까
절반만 사실인 옛말
사주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에서 도화(桃花)라는 낱말을 듣고 표정이 굳는 분들이 많습니다. 도화는 곧 바람기라는 말이 오래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복숭아꽃이라는 고운 이름을 두고도 정작 듣는 사람은 뜨끔해지는, 사주 이야기에서 손에 꼽게 억울한 낱말입니다. 무릎탁 총각은 먼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의 절반만 사실입니다.
도화가 사람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자리라는 것까지는 옛사람도 지금의 강의 전통도 같게 봅니다. 거기까지가 사실인 절반입니다. 다만 그 힘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길이 갈라집니다. 옛말은 걱정부터 앞세워 낙인을 찍었고, 강의 전통은 그 힘이 일할 자리를 먼저 찾습니다. 오늘은 그 갈라진 길을 처음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자·오·묘·유 네 글자
도화는 어디서 오는 표식입니까? 특별한 부적 같은 것이 아니라 여덟 글자 안의 결 하나입니다. 땅의 열두 글자(지지) 가운데 자(子)·오(午)·묘(卯)·유(酉) 네 글자가 태어난 해나 날과 정해진 짝을 이루면 도화라고 부릅니다. 이 네 글자는 열두 자리 중에서도 한 계절의 한가운데, 기운이 가장 또렷하게 서는 자리입니다. 자는 겨울의 복판, 오는 여름의 복판, 묘와 유는 봄과 가을의 복판을 맡습니다.
계절의 복판이라는 말을 조금만 더 풀어 보겠습니다. 초봄이나 늦봄은 다른 계절의 기운이 섞여 있지만, 봄의 한가운데는 봄 하나로만 가득합니다. 기운이 섞이지 않고 짙으니 저절로 도드라집니다. 그래서 강의 전통은 도화를 기운이 짙어서 감추어지지 않는 자리로 읽습니다. 숨으려 해도 눈에 띄고, 가만히 있어도 이목이 모이는 결이 이 글자들의 바탕입니다. 이성 문제라는 딱지는 이 바탕 위에 시대가 얹은 해석일 뿐입니다.
담장의 시대가 붙인 낙인
그렇다면 옛말은 왜 이 표식에 바람기라는 딱지를 붙였습니까? 답은 글자가 아니라 시대에 있습니다. 신분이 태어날 때 정해지고 남녀의 자리가 담장처럼 나뉘어 있던 시대에는, 눈길을 끄는 힘이 곧 구설로 이어지기 쉬웠습니다.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 이목을 모으는 사람은 마을의 질서를 흔드는 존재로 읽혔고, 특히 여성에게는 모이는 시선 자체가 허물처럼 씌워졌습니다.
그 시대에는 끼를 펼칠 무대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노래와 춤과 말재주로 살 수 있는 길이 좁디좁았으니, 도드라지는 기운은 갈 곳을 잃고 구설 근처를 맴돌기 쉬웠습니다. 그러니 옛사람의 걱정은 글자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힘을 받아 줄 자리가 없던 시대의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문이 좁으면 큰 기운일수록 문틀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같은 힘이라도 쓸 곳이 없으면 짐이 되고, 쓸 곳을 만나면 밑천이 됩니다.
이목이 밥이 되는 시대
지금은 어떻습니까? 무대에 서는 사람, 물건과 마음을 함께 건네는 영업의 사람, 화면 너머의 눈길을 모아야 하는 방송의 사람, 상대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하는 상담의 사람에게 이목은 곧 밥입니다. 처음 만난 상대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오는 결은, 배우고 싶다고 해서 쉽게 배워지는 밑천이 아닙니다.
강의 전통은 도화를 바로 그런 자리의 기운으로 봅니다. 방송과 영업과 강연과 예술처럼 시선이 모여야 굴러가는 일에서 도화의 결은 제 쓰임을 찾습니다. 꼭 화려한 직업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면접 자리에서 첫인상이 부드럽게 남는 힘, 가게에 손님이 한 번 더 들르게 하는 힘, 발표 자리에서 듣는 사람의 귀를 열어 두는 힘도 같은 결에서 나옵니다. 옛 시대의 담장이 걷히자 같은 글자가 걱정거리에서 밑천으로 자리를 옮긴 셈입니다.
여기서 하나 덧붙여 두겠습니다. 도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런 길로 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없다고 해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없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덟 글자에는 도화 말고도 사람을 모으는 결이 여럿 있고, 도화는 그중 유난히 눈에 잘 띄는 표식 하나일 뿐입니다. 표식 하나로 사람의 길을 좁혀 읽는 것이야말로 옛말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시대 따라 바뀌는 쓰임
여기서 도화보다 한 뼘 더 큰 이야기를 얻게 됩니다. 여덟 글자는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지만, 그 글자의 쓰임은 시대와 자리에 따라 바뀝니다. 말을 매만지는 결이 옛날에는 글방의 몫이었다면 지금은 마이크와 자막의 몫이 되었고, 낯선 길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결이 옛날에는 떠돌이의 표식으로 불렸다면 지금은 출장과 개척의 힘이 됩니다. 글자는 그대로인데 무대가 바뀌니 대접이 바뀝니다.
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자를 보고 겁부터 먹기보다, 이 힘이 지금 내 삶의 어느 자리에서 일할 수 있는지 묻는 쪽이 강의 전통이 권하는 길입니다. 물론 짙은 기운에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목이 모이는 자리에는 말이 따라붙기 쉬우니, 그 힘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정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도화만의 숙제가 아니라 도드라지는 기운을 가진 모든 결의 숙제입니다. 낙인은 시대가 만든 것이고, 쓰임은 내가 고르는 것입니다.
도화가 있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다고 해서 서운할 일도 아닙니다. 표식은 결의 방향을 알려 줄 뿐이고, 그 힘을 어느 무대에 세울지는 각자의 손에 남아 있습니다. 내 여덟 글자 안에 자·오·묘·유가 어떤 짝으로 앉아 있는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그 결이 지금 하는 일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한 번쯤 차분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걱정거리인 줄 알았던 글자가 실은 오래 놀려 둔 밑천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눈길을 모으는 힘은 숨길 것이 아니라 쓸 곳을 찾아 줄 일이라는 것, 무릎탁 총각이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