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는 조선의 국가고시 과목이었습니다
시간을 적던 글자
사주 이야기를 꺼내면 «미신 아닙니까»라는 물음이 먼저 돌아오는데, 무릎탁 총각의 성향을 따르면 믿으라는 말보다 내력을 보여 드리는 쪽이 정직합니다. 갑자(甲子)·을축(乙丑) 하고 세는 간지(干支)는 상(商)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이미 적혀 있었고, 그때의 쓰임은 시간의 기록이었습니다. 간지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은 본래 계보가 다른 두 계통이라, 오행이 처음 적힌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서는 순서가 수화목금토였고 다섯이 관계를 맺지 않은 낱개였습니다. 서로 누르는 극(剋)은 전국시대 추연(鄒衍)이, 서로 살리는 생(生)은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가 목화토금수 순서로 더한 것입니다.
기준점을 옮긴 사람
사주가 처음부터 태어난 날을 기준 삼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국시대까지는 하늘의 별을 보던 성명법(星命法)이었고, 당(唐)나라까지는 태어난 해를 기준 삼아 띠와 납음오행(納音五行)으로 보던 녹명법(祿命法)이었습니다. 그러다 송(宋)나라의 서자평(徐子平)에 이르러 기준점이 태어난 날, 곧 일간(日干)으로 옮겨 갑니다. 육친(六親)과 십성(十星), 신강약(身强弱)이 이때 자리를 잡고 뒤에 지장간(支藏干)이 더해지니, 고법(古法)과 신법(新法)을 가르는 선도 여기에 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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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이 갈라진 두 칸
주역은 시대를 지나며 두 칸으로 나뉩니다. 상(象)과 수(數)를 얻는 쪽이 상수역(象數易)이고, 만물의 근본 의미를 파고든 쪽이 의리역(義理易)입니다. 두 칸에 음양오행이 각각 결합해 나온 것이 명리학(命理學)과 성리학(性理學)이라, 서자평과 주희(朱熹)가 같은 북송(北宋) 사람이라는 부분도 함께 적힙니다.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국가고시, 음양과(陰陽科)
조선의 과거는 문과와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뽑는 잡과(雜科)로 갈렸습니다. 잡과 안에 음양과가 있었고, 음양과는 다시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곧 풍수, 그리고 사주를 다루는 명과(命科) 셋으로 나뉩니다. 문은 좁아서 시험은 자·오·묘·유(子午卯酉)가 든 해에만 열렸고, 초시를 거쳐 복시로 좁혀 명과는 끝에 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붙은 이들은 왕실의 날을 잡고 궁합을 보았는데, 나라의 낮을 지배한 것은 성리학이라 명리는 제도 안에 있으면서도 뒤로만 쓰였습니다.
육십갑자(六十甲子)라는 톱니바퀴
무릎탁 총각은 사주를 연월(年月) 한 짝과 일시(日時) 한 짝, 맞물린 두 개의 톱니바퀴로 그립니다. 해와 날은 육십갑자가 저절로 도는 자리라 따로 정하는 장치가 없고, 달과 시는 지지(地支)가 열둘로 고정된 채 천간(天干)만 앞자리인 연간(年干)과 일간을 따라 바뀝니다. 이 규칙을 각각 둔월법(遁月法)·둔시법(遁時法)이라 부릅니다. 절기가 드는 시각을 1분 넘겨 태어나면 연주와 월주만 바뀌고 일주와 시주는 그대로인 까닭도 여기서 풀립니다. 연월의 톱니만 한 칸 돌았기 때문입니다. 무릎탁 총각에게 이것은 사람이 끼워 넣은 규칙이 아니라 뒤늦게 발견한 패턴입니다.
역사가 길다는 말의 무게
사주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갑골문의 시간 기록에서 시작해 송나라에서 오늘의 틀이 잡히고 조선에서는 나라가 시험으로 사람을 뽑던, 천 년 넘게 다듬어져 온 계산 체계이자 제도권의 학문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발을 더 디디면 안 되는데, 역사가 길다는 사실이 곧 다 들어맞는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행의 생극이 시대마다 덧대어진 관계의 이름이었듯 명리는 사람이 오래 고쳐 써 온 틀이고, 딱 거기까지만 적어 두는 것이 이 글의 정직입니다.
본인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에도 이미 사주가 매겨져 있습니다. 조선의 시험관들이 들여다보던 그 사주를, 이번에는 본인의 생년월일시로 한번 세워 보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