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살은 몇 개까지 믿어야 합니까
옛 표가 이름 붙인 자리들
사주 풀이에서 도화(桃花)니 역마(驛馬)니 하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름을 통틀어 신살(神殺)이라 부릅니다. 여덟 글자 가운데 특정한 글자와 자리의 짝에 옛 표가 이름을 붙여 둔 것이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일종의 색인이라 받아 두셔도 됩니다. 표에 적힌 자리에 제 글자가 앉으면 이름이 붙고, 아니면 붙지 않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문제는 수입니다. 기타 신살로 묶이는 것만 오백 가지가 넘습니다. 신살의 본산은 연해자평(淵海子平)·삼명통회(三命通會) 같은 옛 책인데, 같은 고전이라도 적천수(滴天髓) 쪽은 신살을 거의 논하지 않습니다. 옛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미 대접이 갈렸던 항목인 셈입니다. 그래서 신살은 처음부터 취용(取用), 곧 무엇을 골라 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무릎탁 총각이 그 많은 이름 가운데 스무 개 안팎만 추려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고수라는 통념
신살을 많이 아는 사람이 깊이 보는 사람이라는 통념부터 짚겠습니다. 그 통념에서 사실인 쪽은 절반쯤입니다. 이름을 많이 아는 것과 그 이름을 세울지 말지를 가리는 것은 다른 능력이고, 풀이의 깊이를 정하는 쪽은 뒤의 것입니다.
셈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백호(白虎)에 드는 간지가 일곱, 괴강(魁罡)이 넷이니 합쳐 열하나로 60갑자의 약 18퍼센트입니다. 아무 기둥에서나 인정하면 다섯 판에 한 판꼴로 서는 셈이라, 이렇게 흔한 표식은 아무것도 갈라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통은 문턱을 둡니다. 일주(日柱)가 백호나 괴강일 때에만 다른 기둥의 것도 함께 세는 식입니다.
12신살에도 같은 문턱이 있습니다. 연지(年支)를 기준으로 세면 지살(地殺)·장성살(將星殺)·화개살(華蓋殺) 셋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기준점에서 저절로 섭니다. 그래서 이 셋은 다른 자리에 하나 더 놓였을 때에야 읽을 거리가 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을 특별한 일처럼 말하는 풀이 앞에서는 일단 걸음을 멈추셔도 됩니다.
뜻풀이보다 기준점
신살에서 가장 먼저 물을 것은 뜻이 아니라 기준입니다. 같은 신살이라도 무엇을 놓고 재는지가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삼기성(三奇星)은 천간만 보고, 원진(怨嗔)·귀문(鬼門)·천라(天羅)·지망(地網)은 지지만 봅니다. 백호·괴강은 간지 한 쌍, 곧 주(柱) 단위로 서고, 양인(陽刃)·문창(文昌)·천을귀인(天乙貴人)은 일간이 기준입니다. 복음(伏吟)·반음(反吟)·공망(空亡)은 일주를 기준으로 잡고, 월덕(月德)·월공(月空)·천의성(天醫星)은 월지를 봅니다. 이 표를 먼저 잡아 두지 않으면 신살은 이름부터 헤매게 됩니다.
12신살은 사정이 더 얽혀 있습니다. 연지 기준과 일지 기준 두 갈래가 있는데, 어느 쪽이 옳은가보다 앞서는 규칙이 둘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풀이 안에서 두 기준이 오가면 그 풀이는 이미 발이 꼬인 상태입니다. 다른 책이나 다른 앱과 결과가 서로 다를 때에도 먼저 볼 것은 뜻풀이가 아니라 기준점입니다.
이름만 그럴듯한 말들
고르는 눈은 그럴듯한 이름 앞에서 시험을 치릅니다. 편야도화(遍野桃花)라는 말이 한 예입니다. 시지의 도화를 그렇게 부르는 말이 퍼져 있으나, 편야는 온 들판이라는 뜻이고 출전이 가리킨 것은 지지 넉 자가 모두 자오묘유로 채워진 판입니다. 애초에 한 자리를 부르는 말일 수가 없습니다.
나체도화(裸體桃花)라는 말은 논리가 스스로 무너집니다. 도화는 지지만 논하는 12신살인데 나체도화는 간지 한 쌍을 논하니 층위부터 어긋나고, 머릿수를 채우려 끌어온 정묘와 계유는 십이운성으로 목욕(沐浴)이 아니라 병(病)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병은 몸의 탈이 아니라 기운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일 뿐입니다. 중심 기준 없이 이름부터 외우면 이런 말들에 그대로 딸려 들어가게 됩니다.
거꾸로, 전통이 취하는 쪽의 말은 늘어놓아 보면 앞서 선 개념으로 되돌아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역마는 반안살(攀鞍殺)·화개와 함께 있어야 좋게 쓰인다는 옛말이 그 예입니다. 실제로 늘어놓으면 반안살의 글자는 모두 토이고 역마는 생지, 화개는 삼합의 마지막 글자인 고지라, 잘 풀릴 잠재성이 있다고 읽던 귀삼합(貴三合)의 짜임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신비한 규칙 하나가 외울 거리에서 아는 개념으로 환원되는 셈입니다. 늘어놓아도 아무것으로도 되돌아가지 않는 말이라면 한 번 더 의심해 보셔도 됩니다.
겁으로 파는 풀이 가려내기
마지막 잣대는 겁입니다. 신살 하나로 판 전체를 정해 버리는 풀이, 무슨 살이 있으니 큰일이라며 값을 부르는 풀이는 구조부터 전통과 어긋납니다. 해석의 번역기는 어디까지나 십성(十星)이고, 신살은 명식의 짜임을 먼저 세운 뒤에 결 하나를 보태는 곁들이라는 것이 무릎탁 총각의 대원칙입니다.
원국에 적힌 신살은 잠재성을 적어 둔 자리이고, 그것이 형태를 얻는 때는 운에서 그 자리가 움직일 때입니다. 한 글자 위에 여러 이름이 겹쳤다고 겹친 수만큼 무겁게 세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 기준점이 다른 표들은 나란히 겹쳐 보는 데서 멈추고, 어느 쪽이 우선이라며 층을 쌓기 시작하면 읽는 사람이 제 걸음에 제가 꼬이게 됩니다.
전통은 신살이 말할 수 있는 규모에도 선을 긋습니다. 나라 단위로 도는 큰일은 개인의 명식보다 큰 차원의 흐름이라 명리(命理)가 다룰 이야기가 아니라고 스스로 좁혀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 이름 하나에 오늘이 통째로 걸린 것처럼 말하는 자리라면, 그 살의 기준점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물어보시면 됩니다. 답이 막히는 풀이가 뜻밖에 많고, 답이 바로 서는 풀이는 애초에 겁을 팔 이유가 없습니다.
신살은 몇 개까지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전통이 내놓은 답은 개수가 아니라 눈이었습니다. 오백 가지 이름을 다 외우는 것보다 스무 개를 고르고 문턱을 세우는 쪽이 판을 깊게 읽습니다. 제 여덟 글자 위에는 어떤 이름이 서 있는지, 그 가운데 기준점과 문턱을 지나 정말로 남는 것은 몇인지 한 번 세어 보시면, 신살이라는 낱말이 겁의 재료가 아니라 고르는 재미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