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 통근(通根) 이야기
여덟 글자는 두 줄로 서 있습니다
사주는 여덟 글자입니다.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마다 글자가 둘씩 붙어, 위로 넉 자와 아래로 넉 자가 두 줄로 섭니다. 위에 서는 것이 하늘 글자, 곧 천간(天干)이고, 아래에 서는 것이 땅 글자, 곧 지지(地支)입니다. 위 글자는 겉으로 드러난 기운이라 그 사람이 밖으로 내보이는 결을 말하고, 아래 글자는 계절과 바탕이라 그 기운이 딛고 선 땅을 말합니다. 그런데 드러나 있다는 것과 힘을 쓴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위 글자가 실제로 힘을 쓰려면 아래 어딘가에 발 디딜 곳이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글자가 넷이니, 위 넉 자마다 이 물음이 하나씩 붙는 셈입니다.
그 발 디딜 곳을 얻은 상태를 통근(通根)이라고 합니다. 뿌리 근 자를 써서, 위 글자가 아래 글자 속의 같은 갈래 기운에 뿌리를 통했다는 뜻입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에서는 위 글자를 볼 때 가장 먼저 이것을 묻습니다 — 이 글자는 뿌리가 있는가, 아니면 떠 있는가. 병에 꽂아 둔 가지와 흙에 뿌리내린 나무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둘 다 겉보기에는 푸른 가지입니다. 그러나 물을 길어 올릴 뿌리가 있는 쪽만 오래 버티고 열매까지 갑니다. 같은 글자라도 뿌리가 있으면 실제로 힘을 쓰는 글자로 보고, 없으면 기세만 있는 글자로 봅니다.
뿌리는 아래 글자 속 숨은 기운에서 찾습니다
그러면 그 뿌리는 어디에서 찾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래 글자는 겉으로는 한 글자이지만, 속에 하늘 기운 여럿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지장간(支藏干)이라고 합니다. 보통 여기(餘氣)·중기(中氣)·정기(正氣) 셋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정기가 그 땅 글자의 대표 기운입니다. 위 글자가 아래 글자 속에서 같은 갈래의 기운을 만나면 통근이 되고, 특히 대표 기운인 정기에 닿으면 뿌리가 튼튼하다고 봅니다. 겉흙 아래 묻힌 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제로 힘을 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통근을 살필 때는 겉으로 드러난 여덟 글자만 보지 않고, 아래 넉 자의 속까지 함께 들여다봅니다.
뿌리를 셀 때는 개수보다 자리를 봅니다. 가장 무거운 자리는 둘입니다. 하나는 그 글자가 앉은 자리, 곧 바로 아래의 땅 글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태어난 달의 땅 글자입니다. 태어난 달은 여덟 글자 전체의 기운을 총괄하는 자리라, 거기에 뿌리를 둔 위 글자는 판에서 실제로 힘을 쓰는 글자가 된다고 봅니다. 이 자리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는 칼럼의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거꾸로 가벼운 자리에 뿌리가 여럿 깔려 있어도, 앉은 자리와 태어난 달을 다 잃었다면 그 글자의 발판은 여린 쪽으로 봅니다. 뿌리가 몇 개인지보다 어느 자리에 박혔는지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뿌리도 상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담은 아래 글자가 다른 글자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자리에 걸려 있으면, 겉의 글자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든 기운도 상해서 쓰기 어렵다고 봅니다. 흙은 있는데 그 흙이 갈아엎어지는 중이라면 뿌리가 편히 뻗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겉의 두 줄만 훑어서는 보이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뿌리를 세 물음으로 살핍니다. 있는가, 어느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성한가. 이 셋을 다 지나야 그 글자의 발판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뿌리가 있다 없다 한 마디로 끝내지 않는 것입니다.
뿌리 있는 글자와 뜬 글자는 이렇게 다릅니다
큰 나무에 붙이는 글자인 갑(甲)을 예로 들겠습니다. 갑은 곧게 서서 위로 뻗는 기운이라 시작과 개척의 결로 읽습니다. 그런데 같은 갑이라도 아래에서 뿌리를 얻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뿌리를 얻은 갑은 그 기세가 실물이 된다고 봅니다. 벌인 일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라는 쪽입니다. 뿌리 없는 갑은 기세만 남아, 시작은 크고 마무리가 얕은 쪽으로 봅니다. 옛 책이 갑에 유시무종(有始無終) —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다 — 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그 말도 아무 갑에나 붙이지 않고 뿌리 없는 경우를 두고 한 말로 읽는 것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이 얼개는 갑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열 개 하늘 글자 전부에 적용됩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위에 뜬 글자를 평가할 때 절차를 두 단계로 둡니다. 먼저 뿌리를 봅니다. 앉은 자리부터 보고, 태어난 달을 보고, 나머지 자리를 봅니다. 그다음에 관계를 봅니다. 그 글자 곁에 선 글자들이 힘을 보태 주는지, 깎아 내는지, 빼내 가는지를 하나씩 셉니다. 여기에 거리도 함께 봅니다. 같은 글자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손이 닿기 어렵다고 읽습니다. 뿌리 몇 개, 도움 몇 개 하고 개수를 세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 까닭이 이 두 단계에 있습니다.
뜬 글자라고 버려진 글자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뿌리 없는 글자는 못 쓰는 글자인가 싶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닫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무릎탁 총각의 전통이 경계하는 읽기입니다. 뿌리가 없어도, 곁의 기운들이 나에게로 이어져 흘러드는 짜임이면 뿌리 없이 살아 있는 판으로 봅니다. 이를테면 곁의 또래 같은 기운이 나를 받쳐 주고, 그 기운이 다시 채워 주는 기운의 도움을 받는 식으로 흐름이 이어지면, 판의 한쪽에 물길이 돌아 살 만한 짜임이 됩니다. 덩쿨에 붙이는 글자인 을(乙)은 아예 뿌리가 얕아도 곧장 꺾이지 않는 쪽으로 봅니다. 굽히고 휘어서 갈 길을 찾는 힘이 가장 크게 말해지는 글자여서입니다.
뿌리는 나중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태어난 판에는 없던 뿌리가 열 해 단위의 큰 흐름에서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그 기운을 오히려 잘 쓰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그러니 통근은 좋은 사주와 나쁜 사주를 가르는 잣대가 아닙니다. 어느 글자가 지금 실제로 힘을 쓰고 있고, 어느 글자가 발판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읽는 순서입니다. 여덟 글자는 어차피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 있어서, 기울었다는 사실보다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었는지를 보는 것이 이 전통의 눈입니다. 아래 글자 속 숨은 기운 이야기와 힘의 저울 이야기는 칼럼의 다른 글에서 이어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사주의 위 넉 자가 각각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시면 이 글이 훨씬 가깝게 읽힙니다. 태어난 날의 하늘 글자가 앉은 자리에 뿌리를 두었는지, 태어난 달에 뿌리를 두었는지, 아니면 떠서 곁의 흐름에 기대고 있는지 — 그것만 보아도 여덟 글자가 서로 붙들고 선 모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 여덟 글자를 세워 위와 아래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