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견과 겁재 — 어깨를 겯는 힘과 몫을 나누는 자리
나와 같은 기운이 서 있는 자리
사주 여덟 글자를 펼치면 나를 가리키는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태어난 날의 하늘 글자, 곧 일간(日干)입니다. 그런데 판을 둘러보면 이 일간과 오행(五行)이 같은 글자가 또 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글자를 비견(比肩)과 겁재(劫財)라 부르고, 둘을 묶어 비겁(比劫)이라 합니다. 음양(陰陽)까지 나와 같으면 비견이고, 오행은 같은데 음양이 다르면 겁재입니다. 비견이라는 이름부터가 어깨를 나란히 견준다는 뜻입니다. 나와 같은 급의 존재, 곧 형제와 친구와 동료와 경쟁자가 모두 이 자리에 들어온다고 봅니다. 여덟 글자는 사람마다 짜임이 달라, 이 자리가 두터운 판도 있고 아예 비어 있는 판도 있습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이 기운을 한마디로 일간의 확장이라 부릅니다. 나와 같은 기운이 늘어난 만큼 내가 커진다는 뜻입니다. 커지는 것은 넷입니다. 자의식과 주관이 커지고, 사적인 관계의 영역이 커지고, 타고난 기운 자체가 커지고, 나로부터 나오는 욕망이 커집니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 주장과 고집이 되고, 또 실행력과 추진력이 됩니다. 무릎탁 총각은 십성(十星) 열 글자를 자동차 한 대에 대입해 붙잡곤 하는데, 그 그림에서 비겁은 엔진의 배기량입니다. 차가 움직이는 데 쓰는 힘의 크기가 이 자리에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배기량이 크다고 좋은 차이고 작다고 아쉬운 차인 것이 아니라, 차의 성격이 서로 다를 뿐이라는 태도가 이 교보재의 첫 가르침입니다.
하루의 흐름으로 옮겨도 같은 그림이 나옵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열 가지 기운을 하루 한 바퀴에 얹는데, 그 순환에서 비겁은 아침입니다. 눈을 뜨고 오늘은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의지와 욕망이 비겁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운이 두터운 사람은 하루를 제 힘으로 밀고 나가려는 결이 뚜렷하고, 옅은 사람은 그 시동을 다른 자리에서 빌려 오는 결이 됩니다. 어느 쪽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힘의 출처가 서로 다를 뿐입니다. 덧붙여 무릎탁 총각의 전통에서 일간을 돕는 자리는 나를 채워 주는 인성(印星)과 이 비겁 둘인데, 그 둘이 나머지 셋을 감당할 만큼 무겁다고 볼 정도로 비겁은 든든한 내 편이기도 합니다.
어깨를 겯는가, 몫을 나누는가
그렇다면 비견과 겁재는 어디서 갈리는가 하는 물음이 남습니다. 무릎탁 총각이 드는 잣대는 하나입니다. 파이를 나누어야 하는 사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급의 존재라도 찾는 사람이 서로 겹치지 않아 한 무대에 함께 설 수 있으면 비견입니다. 반면 하나의 몫을 두고 꼭 나누어 가져야 하는 사이면 겁재입니다. 무릎탁 총각이 든 예가 치킨집입니다. 우리 가게 옆에 또 치킨집이 들어서는 상황, 그것이 겁재의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글자라도 어떤 사이로 서느냐에 따라 이름이 갈리는 셈입니다. 치킨집 이야기는 웃자고 든 예가 아니라, 겹치는 몫이 있는가 하는 잣대를 눈앞에 세워 주는 그림입니다.
속마음의 층에서도 둘은 갈립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비견에 자존이라는 말을, 겁재에 경쟁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둘 다 일간과 오행이 같고 음양만 갈리는데, 비견은 같음에 방점이 있고 겁재는 다름에 방점이 있어 여기서부터 결이 벌어진다고 봅니다. 비견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결과를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다. 겁재는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선을 긋고 이기려 드는 호승심(好勝心)의 자리라, 그 경쟁심은 겉과 속이 갈려 티가 잘 나지 않는다는 말이 함께 붙습니다. 그래서 같은 협업이라도 비견의 결이 두터운 사람과 겁재의 결이 두터운 사람은 함께 일하는 모양이 사뭇 달라진다고 이야기됩니다.
겁재라는 이름이 무겁게 적힌 까닭
옛 책을 펼치면 겁재라는 글자 곁에 무거운 말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이름부터가 재물을 뜻하는 재(財)를 겁박한다는 뜻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여기서 흥미로운 역전 하나를 짚습니다. 명리는 나와 음양이 다른 글자에 정(正)을, 같은 글자에 편(偏)을 붙이고, 옛 표를 보면 대체로 정 쪽에 좋은 말이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비견은 편의 자리인데 좋은 뜻이 많고, 겁재는 정의 자리인데 흉한 말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이름의 무게가 정편의 결과 거꾸로 서 있는 것입니다. 표를 가로로 읽을 때는 맞던 논리가 세로로 읽으면 이 두 자리에서 뒤집히는 셈입니다.
무릎탁 총각은 이 역전을 기준을 옮겨 풉니다. 나를 기준으로 세지 않고 내 짝을 기준으로 다시 세어 보면, 겁재는 배우자 자리의 글자를 가장 세게 누르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재물과 배우자의 자리를 흔들 수 있는 위치라서 옛 책이 흉한 말을 몰아 두었다는 풀이입니다. 다만 무릎탁 총각은 그 흉의를 그대로 받지 말라고 못 박습니다. 정과 편은 선악이 아니고, 치우쳤다는 말은 세기가 고르지 않다는 말일 뿐이며, 그 기운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는 글자 이름이 아니라 판 전체가 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글자 하나로 사람을 가늠하지 않는 태도가 이 관법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무릎탁 총각은 겁재를 흉하다고 덮어 두지 않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자리에서 버티는 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는 동력으로 쓰는 길을 먼저 봅니다. 이기려는 마음이 있어야 넘을 수 있는 문이 세상에는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겁재가 두터운 사람이 그 기운을 승부의 자리에서 쓰면, 옛 책이 적어 둔 무거운 말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름을 얻고도 실제는 다른 층에 있는 글자가 겁재만은 아닙니다. 칼럼의 다른 글 «편관 — 칠살이라는 무서운 이름의 진실»에서도 비슷한 사정을 다루었으니, 이름의 무게와 글자의 쓰임을 나누어 보는 눈은 그 글과 나란히 두고 보시면 좋습니다.
두터울 때 — 세상이 만만해지는 자리
비겁이 판에서 가장 두터운 세력이 되면 어떤 결이 되는지 보겠습니다. 무릎탁 총각은 이런 판을 세상이 만만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제 에너지가 크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근거를 대기 어려운 자신감이 함께 선다는 것입니다. 이 자신감은 큰일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되기도 하고, 삶의 진폭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고 읽습니다. 특히 크게 걸리는 것이 재물을 다루는 기운인 재성(財星)과의 관계입니다. 나 쪽이 세면 재성이 만만해 보이고, 그만큼 얻고 잃는 폭이 커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재성이 어떤 기운인지는 칼럼의 다른 글 «재성 — 명리가 돈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로 풀어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두터운 비겁이 갈 곳 없는 힘은 아닙니다. 무릎탁 총각은 반대쪽 길을 함께 엽니다. 무엇이 많으면 압력이 높아져 흘러가려 하는 법이라,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펼쳐 내는 기운인 식상(食傷)이 곁에 서 있으면 이 큰 힘이 베푸는 쪽으로 시원하게 쓰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나를 다스리는 기운인 관성(官星)이 비겁을 눌러 주면 그 눌림이 곧 스스로를 다잡는 절제의 힘이 됩니다. 관성이 누르는 대상이 나와 같은 기운, 곧 나 자신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힘이 크다는 사실은 그대로여도, 그 힘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판의 짜임이 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밑바닥도 하나 일러 둘 만합니다. 무릎탁 총각의 전통은 비견과 겁재의 자리에 통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놓습니다.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 제약에 얽히는 것이 이 기운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상태라, 그런 자리에 놓이면 물러서기보다 자기를 더 강화하는 쪽으로 간다고 읽습니다. 주장이 세지고 고집이 두터워지는 것이 그 반응입니다. 이 대목은 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알려 주는 단서입니다. 비겁이 지키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고, 그것이 이 기운을 일간의 확장이라 부르는 까닭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은 기운이 여덟 글자 안에 몇이나 서 있는지, 그 글자가 어깨를 겯는 비견인지 몫을 나누는 겁재인지는 만세력을 펼쳐야 보입니다. 같은 자신감이라도 어느 글자에서 나오는지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니, 제 판에서 이 기운이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주페이지에 생년월일시를 넣으면 여덟 글자와 그 안에 선 십성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