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운성 — 열두 이름은 인생 성적표가 아닙니다
이름만 보고 덮지 마십시오
만세력을 처음 펼친 분들이 십이운성(十二運星) 칸에 사(死)나 병(病), 묘(墓) 같은 글자가 적혀 있으면 가슴이 철렁한다고들 하십니다. 그 놀람의 절반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나머지 절반은 이름표를 실물로 읽은 오해입니다. 기운이 맺히고 자라고 왕성해지고 저장되어 쉬는 성향을 열두 마디로 나눈 뒤, 사람이 나고 자라는 과정에 빗댄 이름을 마디마다 붙인 것이 십이운성입니다. 그러니 저 글자들은 몸의 일도 삶의 마디도 아니고, 기운의 구간을 부르는 비유일 뿐입니다.
지점이 아니라 구간입니다
십이운성이 하는 일은 십성(十星)이 못 가르는 것을 가르는 일입니다. 십성으로만 보면 갑진(甲辰)과 갑술(甲戌)이 한 글자로 묶이는데, 앉은 지지가 다르니 기운의 상태가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상태를 재는 자가 십이운성이고, 이 자는 지점이 아니라 구간을 잽니다. 각 구간의 왕쇠(旺衰)는 기운의 높이와 기울기, 두 눈으로 봅니다.
목욕(沐浴)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구간에서 선을 아래로 푹 꺾어 그린 그래프가 널리 돌지만, 목욕은 장생(長生) 다음이라 높이는 오히려 오르는 중입니다. 이 구간에 따라붙는 것은 힘을 쓰는 과정의 시행착오라는 질적인 부분이고, 별명인 욕패(浴敗)도 높이가 아니라 그 질을 두고 붙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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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가 늘 웃는 자리도 아닙니다
제왕(帝旺)은 열둘 가운데 수준이 가장 높은 자리지만, 정점 그 자체가 아니라 정점을 막 지나온 구간입니다. 무릎탁 총각은 이 자리를 진폭을 키우는 극단성의 인자로 읽어, 반가운 쪽도 궂은 쪽도 함께 커진다고 봅니다. 거꾸로 궂은 성향이 낮은 구간에 서면 오히려 잠잠해지니, 십이운성은 길흉(吉凶)의 개념이 아니라 높낮이와 방향을 재는 도구입니다.
쇠(衰)도 마찬가지여서, 높이가 아직 제법 남았는데 기울기가 막 돌아선 첫 구간이라 옛 글은 이 자리에 노련함을 나란히 적었습니다. 다만 연해자평(淵海子平)이 건록(建祿)을 후하게 적은 것처럼 옛 책마다 치우침이 있어, 무릎탁 총각은 그 편향을 알고 가려 읽습니다.
사다리가 아니라 고리입니다
열두 이름을 성적표처럼 읽는 오해의 뿌리는 이것을 사다리로 그리는 데 있습니다. 십이운성은 위 칸으로 올라가다 끝나는 층계가 아니라 고리입니다. 장생에서 사까지 여덟 구간은 기운이 드러나 움직이는 쪽이고, 묘·절(絶)·태(胎)·양(養) 넷은 안으로 저장된 쪽이며, 이 열둘이 계절처럼 맞물려 돕니다. 장생·제왕·묘 세 꼭짓점을 이으면 삼합(三合)이 되니, 열두 이름이 층계가 아니라 원 위의 좌표라는 증거가 이 안에 이미 있습니다.
때가 통째로 바뀌는 자리는 장생과 묘 두 곳입니다. 묘는 드러나 움직이던 때가 안으로 저장되는 쪽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자리이니, 거둬들인 것이 있어야 다음 주기가 있습니다. 저장을 손해로 읽을 일이 아닙니다.
절처봉생, 끝자리 다음의 새 돋음
고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절에 있습니다. 절은 기운이 끊기는 최저점이면서 동시에 새 주기가 열리는 지점이라, 무릎탁 총각은 이 겹침을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부르고 십이운성이 가진 가장 중한 뜻으로 꼽습니다. 절을 포(胞)라고도 하는데 포는 세포를 가리키는 말이라, 새 기운이 맺히는 첫 자리라는 뜻이 이름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절 다음의 태는 기운이 다시 맺히기 시작한 구간이고, 그다음의 양은 수준이 아직 낮아도 기울기가 크게 오르는 자리입니다. 가장 낮은 이름 다음에 새 돋음이 오도록 짜인 것이 이 이론의 척추입니다. 열두 이름 어디에 서 있든 그 자리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구간이니, 낮다는 사실 하나로 접어 둘 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세력에서 무거워 보이는 글자를 만나셨다면, 그 이름이 열두 고리의 어느 자리에 있고 바로 다음 구간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더 보시기 바랍니다. 성적표처럼 보이던 칸이 계절표로 다시 읽히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