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과 신약 — 저울이 먼저입니다
글자보다 먼저 하는 일
사주 여덟 글자를 받아 들면 사람들은 보통 특별한 글자부터 찾습니다. 재물의 글자가 있습니까, 벼슬의 글자가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강의 전통은 순서를 다르게 잡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살피기 전에, 먼저 저울부터 올립니다. 그 저울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태어난 날의 하늘 글자, 곧 나 자신을 뜻하는 일간(日干)입니다. 저울질 없이 글자만 읽는 풀이는, 처방 없이 약재 이름만 외우는 일과 같습니다.
나머지 일곱 글자는 저마다 이 일간을 돕거나, 일간의 힘을 빼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나를 낳아 주는 기운과 나와 같은 기운은 돕는 쪽이고, 내가 낳는 기운과 내가 다스리는 기운과 나를 누르는 기운은 힘을 빼는 쪽입니다. 돕는 기운이 넉넉하면 신강(身强)한 결, 힘을 빼는 기운이 크면 신약(身弱)한 결이라 부릅니다. 사주 풀이의 첫걸음은 언제나 이 저울눈을 읽는 일입니다.
저울눈을 읽는 세 물음
그렇다면 저울눈은 무엇으로 읽습니까? 강의 전통은 크게 세 물음을 차례로 던집니다. 첫째, 태어난 달이 내 기운의 계절입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여름에 태어난 불과 겨울에 태어난 불은 출발선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앉은 자리가 나를 받쳐 줍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일간 바로 아래 놓인 글자가 내 뿌리 노릇을 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셋째, 여덟 글자 전체에서 내 편이 얼마나 됩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세 물음 가운데 계절의 무게가 가장 크고, 자리와 세력이 그 뒤를 받칩니다. 다만 실제 저울질에는 글자끼리 만나 성질이 바뀌는 사정까지 얹히므로, 처음 배우시는 분은 이 뼈대만 기억해 두셔도 충분합니다. 예컨대 나무의 기운으로 태어난 사람이 봄에 나면 계절을 얻은 것이고, 가을에 나면 계절을 잃은 채 출발하는 셈입니다.
신강, 넉넉한 저수지의 결
신강한 결은 내 기운이 여덟 글자 안에 넉넉히 깔린 모양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가득 찬 저수지와 같습니다. 물이 많다는 것 자체는 든든한 일이지만, 흘려보낼 물길이 없으면 오히려 둑이 버거워집니다. 이런 결은 대체로 제 목소리가 또렷하고 밀어붙이는 힘이 좋습니다. 그래서 신강한 결에는 무엇보다 기운을 실어 나를 데가 필요합니다.
일을 벌여 재주를 쓰게 하는 식상(食傷), 그 재주가 닿아 열매를 맺는 재성(財星), 나를 눌러 결을 다듬는 관성(官星)이 그런 물길 노릇을 합니다. 재주 있는 사람이 무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 재주가 안에서 끓듯이, 신강한 기운도 쓸 곳이 없으면 고집이나 조급함으로 새어 나오기 쉽습니다. 신강한 결이 스스로에게 던질 물음은 «나는 충분한가»가 아니라 «이 넉넉한 기운을 어디에 부릴 것인가»입니다. 부릴 자리를 만난 신강은 큰일을 오래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
신약, 기둥이 필요한 결
신약한 결은 반대로 주변 기운이 크고 내 기운이 조촐한 모양입니다. 해야 할 일, 감당할 재물, 눌러 오는 책임의 글자가 여덟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많은데 그것을 받아 낼 그릇이 상대적으로 작은 형국이니,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일감이 아니라 기대어 설 기둥입니다. 그 자체로는 섬세하고 주변을 살피는 눈이 밝은 결이기도 합니다.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는 인성(印星),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겁(比劫)이 그 기둥이 됩니다. 배움과 어른의 그늘, 짐을 나눠 지는 동료와 벗이 신약한 결에는 보약 같은 자리입니다. 혼자 다 짊어지려는 습관보다 배우고 묻고 나누는 습관이 이 결에는 살길이 됩니다. 기둥을 갖춘 신약은 제 몸집보다 큰 짐도 무리 없이 감당해 냅니다. 기둥이 되어 줄 글자가 사주 안에 이미 있는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가 이 결의 살림을 좌우합니다.
강함과 약함이라는 말의 함정
여기서 꼭 짚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신강은 우월하고 신약은 열등하다는 말이 돌아다닙니다. 그 말은 절반도 사실이 아닙니다. 강의 전통에서 신강과 신약은 잘남과 못남을 가르는 자리가 아니라, 처방이 갈리는 갈림길일 뿐입니다. 저울은 무게를 재는 도구이지 사람의 값을 매기는 도구가 아닙니다. 몸이 더운 사람과 찬 사람에게 서로 다른 차를 권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신강한데 기운을 부릴 데가 없으면 넘치는 물이 제 둑을 흔들고, 신약해도 기둥이 튼실하면 큰살림을 너끈히 꾸립니다. 그러니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 자체보다, 기운 쪽을 받쳐 주거나 눌러 주는 글자가 제자리에 있느냐가 삶의 결을 가릅니다. 강해서 다행인 것도, 약해서 서러운 것도 아닙니다.
억부, 누르고 받쳐 주는 처방
이 저울질에서 나오는 처방의 논리를 억부(抑扶)라 부릅니다. 넘치는 것은 눌러 주고 모자란 것은 받쳐 준다는 뜻입니다. 억누를 억(抑)에 도울 부(扶), 이름 그대로의 처방입니다. 억부의 눈으로 보면 같은 글자도 저울에 따라 약이 되고 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재성은 신강한 결에는 기운을 풀어놓을 반가운 마당이지만, 신약한 결에는 어깨를 더 무겁게 하는 짐이 됩니다. 관성도 마찬가지로, 넉넉한 결에는 결을 다듬는 스승이 되고 조촐한 결에는 버거운 상전이 됩니다. 같은 이치로 인성은 신약한 결에 단비가 되지만, 신강한 결에 지나치게 많으면 안주를 부추기는 그늘이 됩니다. «재성은 반가운 글자»라는 식의 한 줄 풀이가 자주 어긋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글자의 이름보다 저울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내 사주에 어떤 글자가 들어 있는지 세어 보기 전에, 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부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여덟 글자라도 저울눈을 알고 읽으면 처방이 달라집니다. 내 일간은 넉넉해서 부릴 데를 찾는 결입니까, 아니면 기대어 설 기둥을 찾는 결입니까? 여덟 글자를 이미 알고 계시다면 태어난 달과 앉은 자리부터 차근히 짚어 보시고, 아직이시라면 자기 여덟 글자 앞에서 이 첫 저울질을 직접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주라는 오래된 언어가 한결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