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반에 태어난 사람의 하루는 언제 바뀝니까
달력은 오늘, 시간은 내일
밤 11시 반에 태어난 아기가 있습니다. 병원 기록에는 또렷하게 오늘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명리(命理)의 옛 시간법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옛사람들은 하루를 열두 토막으로 나누었고,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를 자시(子時)라 하여 그 열두 토막의 첫 자리에 두었습니다. 열두 동물 가운데 쥐가 이 시간의 주인이니, 세상이 다 잠든 때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짐승에게 하루의 첫 자리를 내어 준 셈입니다. 그러니 밤 11시 반은 달력으로는 아직 오늘인데, 옛 시간으로는 벌써 내일의 첫 칸에 들어서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물음이 생깁니다. 이 아기의 태어난 날은 오늘입니까, 내일입니까. 사주는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각각 두 글자씩 여덟 글자로 적는 학문이니, 날이 바뀌면 그 가운데 두 글자가 함께 바뀝니다. 작은 경계 다툼처럼 보이지만 실은 풀이의 한복판을 흔드는 물음입니다. 밤 11시 반의 삼십 분이 어느 날에 속하는가를 두고, 명리는 오랫동안 답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습니다.
천 년을 이어 온 경계 논쟁
이 물음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닙니다. 옛 학인들도 자시를 앞에 두고 오래 갈렸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옛 시간의 첫 칸에 둘 것인가, 아니면 날짜가 넘어가는 순간에 둘 것인가 하는 다툼입니다. 물시계로 밤을 재던 시절에도 답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고, 근대에 들어 시계가 자정을 기준으로 정비된 뒤에는 논쟁이 한 겹 더 두꺼워졌습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크게 세 갈래의 학파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근거 없이 서 있지 않으니, 누가 옳은가보다 서로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를 보는 편이 이해에 가깝습니다.
세 학파의 세 가지 답
첫째는 정자시(正子時) 학파입니다. 밤 11시가 되는 순간 하루가 통째로 넘어간다고 봅니다. 자시는 새 하루의 첫 시간이니 그 첫 순간부터 날도 함께 바뀌어야 앞뒤가 선다는 생각입니다. 밤 11시 반 출생이라면 날의 두 글자도 이미 다음 날의 것으로 적습니다. 옛 시간의 질서를 하나로 꿰는 깔끔한 답입니다.
둘째는 야자시(夜子時) 학파입니다. 자시를 자정 앞뒤로 반씩 나눕니다. 밤 11시부터 자정까지는 밤의 자시라 하여 날은 아직 오늘로 두고, 시간의 글자만 다음 날의 결을 따르게 합니다. 자정이 지나 새벽 자시가 되면 그때 비로소 날이 바뀝니다. 잠들기 전의 밤은 아직 오늘이라는 살갗의 실감과, 자시가 새 하루의 문턱이라는 옛 질서를 반씩 살린 절충의 답입니다.
셋째는 자정 기준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시계 그대로, 자정 이전은 온전히 오늘로 보고 자정 이후만 내일로 봅니다. 오늘의 달력 감각과 가장 가까워 설명이 쉬운 답이지만, 옛 시간법이 품고 있던 결에서는 한 걸음 멀어집니다.
일주가 통째로 바뀌는 자리
태어난 날의 두 글자를 일주(日柱)라 부릅니다. 일주는 여덟 글자 가운데서도 나 자신의 자리로 읽히는 기둥이라, 풀이의 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밤 11시 반 출생이라면 학파에 따라 이 기둥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오늘이 갑자(甲子)일이고 내일이 을축(乙丑)일일 때, 야자시와 자정 기준은 갑자를 일주로 세우고 정자시는 을축을 일주로 세웁니다. 예순 가지 일주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기둥이 되느냐가 학파 하나로 갈라지는 셈입니다. 일주가 바뀌면 나를 나타내는 글자가 바뀌고, 그 글자를 중심으로 읽던 나머지 여섯 글자와의 관계도 전부 다시 짜입니다.
자시 출생인데 풀이가 어쩐지 낯설게 읽힌다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 낯섦의 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곳은 정자시로, 어느 곳은 야자시로, 어느 곳은 자정 기준으로 만세력을 세우니, 같은 생년월일시를 넣어도 서로 다른 여덟 글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풀이가 어긋난 것이 아니라 출발점의 약속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내 여덟 글자가 두 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자의 잣대가 두 갈래였을 뿐입니다. 어느 학파로 세웠는지 모른 채 이곳저곳의 풀이를 오가면, 낯섦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계에 바짝 붙은 시각이라면
출생 시각이 밤 11시 55분처럼 자정에 바짝 붙어 있다면 조금 더 찬찬히 볼 일입니다. 시계의 시각과 하늘의 시각이 꼭 같지 않다는 사정까지 겹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쓰는 표준시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시계를 나누어 쓰는 약속이라, 태어난 곳의 하늘로 보면 몇십 분씩 앞뒤로 밀려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경계 위의 출생이라면 학파의 갈림에 이 밀림까지 더해지니, 한 가지 답만 쥐고 있기보다 갈래마다 세워 보고 견주는 쪽이 안전합니다. 강의 전통도 경계의 시각은 서둘러 단정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사주페이지가 문을 열어 둔 방식
강의 전통 안에서는 이 가운데 야자시의 손을 들어 주는 흐름이 두텁습니다. 날짜의 실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옛 시간의 질서를 함께 살리기 때문입니다. 사주페이지도 무릎탁 총각이 권하는 야자시를 기본으로 두었습니다. 다만 어느 학파가 그르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배운 자리가 따로 있는 분을 위해, 학파를 직접 바꿔 같은 시각을 다른 경계로 세워 볼 수 있게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경계를 바꿔 보는 일 자체가 자기 여덟 글자를 한층 깊이 들여다보는 공부가 됩니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에 태어나셨다면, 자신의 여덟 글자가 어느 경계 위에 서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자시로 세운 일주와 정자시로 세운 일주를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면, 그동안 낯설게 읽히던 풀이의 실마리가 그 경계에서 풀릴 수도 있습니다.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남보다 한 번 더 살펴볼 기회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루가 언제 바뀌는가 하는 오래된 물음은, 결국 나를 어느 자리에 세워 읽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