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은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 볕과 그늘의 언덕
언덕에서 온 두 글자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글자를 뜯어 보면 둘 다 언덕 부(阜)를 품고 있습니다. 볕이 드는 쪽 비탈이 양이고, 그늘이 진 쪽 비탈이 음입니다. 그러니까 음양은 처음부터 두 개의 다른 물건이 아니라, 한 언덕의 두 면을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무릎탁 총각이 음양 공부의 첫머리에 이 자의(字義)를 놓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해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아침의 볕받이가 오후에는 그늘이 되고, 그늘이던 비탈에 다시 볕이 듭니다. 음양의 첫 속성은 그래서 멈추지 않는 바뀜입니다. 역(易)이라는 글자에는 발음이 둘 있어서 바뀔 역으로 읽으면 변화가 되고 쉬울 이로 읽으면 단순함이 되는데, 옛 책은 이 두 발음을 나누어 쓰며 세 가지를 적어 두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바뀌고, 그 바뀌는 이치 하나만은 바뀌지 않으며, 그 이치는 대단히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계사전(繫辭傳)은 태극(太極)에서 양의(兩儀)가 나오고 양의에서 사상(四象)이 나온다고 적었습니다. 하나가 갈라지고 갈라진 것이 다시 섞이는 결을 세는 공부, 그것이 음양이 놓인 큰 틀입니다. 좋음과 나쁨을 가르기 전에, 음양은 먼저 이 바뀜의 자에서 출발합니다.
남자들이 모두 떠난 아침
무릎탁 총각은 음양의 둘째 속성을 사고실험 하나로 설명합니다. 세상의 남자가 모두 다른 별로 옮겨 갔다고 한번 두어 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지구에 남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아침부터는 남은 쪽도 더는 여자가 아니게 됩니다. 여자라는 말 자체가 남자를 전제로 서 있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위가 사라지면 아래라는 말이 설 자리를 잃고,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라는 말도 함께 지워집니다. 그래서 음양은 절대량이 아니라 상대(相對)입니다. 어느 쪽이 두텁다는 말은 언제나 한 판 안에서의 저울이고, 짝이 지워지면 이름도 함께 지워집니다. 그렇다면 좋은 쪽 하나만 남기고 나쁜 쪽을 걷어 내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걷어 내는 순간 남긴 쪽의 이름까지 함께 무너지니, 음양에서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주문입니다. 낮이 좋고 밤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듯, 볕과 그늘도 우열의 짝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 주는 짝입니다.
드러남과 갈무리, 기와 질
그렇다면 실제로 무엇을 양으로 보고 무엇을 음으로 봅니까? 무릎탁 총각이 통째로 외워 두라고 권하는 정의는 다섯 쌍입니다.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그리고 무형(無形)의 것과 유형(有形)의 것입니다. 앞자리가 양이고 뒷자리가 음입니다.
마지막 한 쌍이 나머지 넷을 끌고 갑니다. 유형은 눈에 보이니 질(質)이 되고, 무형은 보이지 않으니 기(氣)가 됩니다. 이 두 글자는 그대로 사주의 골격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의 글자인 천간(天干)은 기의 자리라 뜻과 마음으로 읽고, 땅의 글자인 지지(地支)는 질의 자리라 현실과 무대로 읽습니다. 뜻이 먼저 움직이고 현실이 그 뒤를 따라오는 결을 나누어 읽는 눈이 바로 이 한 쌍에서 나옵니다. 다섯 쌍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 보아도 우열을 가르는 말은 한 줄도 없습니다. 드러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 있을 뿐입니다.
왜 양음이 아니라 음양입니까
우리말의 두 글자 짝은 대개 양의 성질이 앞에 섭니다. 전후(前後), 고저(高低), 장단(長短)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음양만은 음이 앞입니다. 양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하필 이 말에서만 뒤로 물러났겠습니까? 한자 문화권의 공부는 글자의 뜻에서 시작한다고 무릎탁 총각은 말하는데, 순서에도 같은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답은 앞의 다섯 쌍에서 곧장 나옵니다. 음은 무거우니 내려가고 양은 가벼우니 올라갑니다. 양을 위에 두면 가벼운 것은 더 올라가고 무거운 것은 더 내려가, 둘이 만날 자리가 없어집니다. 음을 앞에 세워야 아래의 음이 올라오고 위의 양이 내려와 가운데서 섞입니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옛말도,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두라던 말도 같은 배치에서 나온 말입니다. 음양이라는 이름의 순서 자체가 이미 둘을 만나게 하려는 설계인 셈입니다. 하나를 올리고 하나를 내치는 서열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름 아닌 그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덟 글자의 배합이 말하는 결
이제 처음의 통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양은 좋고 음은 나쁘다는 말에는 걸쳐 앉을 자리가 절반쯤은 있습니다. 양이 두터운 판이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결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이 통째로 비어 있습니다. 음이 두터운 판은 갈무리하고 저장하는 데 능한 결이지, 무엇이 모자란 판이 아닙니다.
애초에 어둡다는 인상은 글자에 든 것이 아니라 보는 쪽이 얹은 것입니다. 부호 자체에는 뜻이 없고 사람이 얹은 뜻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무릎탁 총각의 대전제인데, 음이라는 부호에 나쁨이라는 뜻을 얹은 것은 옛 이치가 아니라 훗날의 습관입니다. 그늘 비탈이 없으면 언덕이 아니라 절벽이 됩니다.
여덟 글자의 음양 배합이 말하는 것은 우열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양이 많으면 벌이고 드러내는 쪽에 힘이 실리고, 음이 많으면 거두고 여물게 하는 쪽에 힘이 실립니다. 씨앗을 두고 꽃보다 어둡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씨앗은 꽃이 하지 못하는 일, 곧 다음 계절을 여는 일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이는 힘과 여무는 힘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계절이 없듯, 여덟 글자도 두 힘의 자리다툼이 아니라 나눠 맡음으로 읽는 편이 온당합니다.
배합이 한쪽으로 크게 기운 판도 못 쓰는 판이 아닙니다. 전통은 그런 판을 두고 두 기운이 만날 자리가 어긋나 있다고 읽을 뿐이며, 그럴수록 둘 사이를 이어 줄 글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찾습니다. 볕받이 비탈과 그늘 비탈이 함께 있어야 언덕이 서듯, 여덟 글자도 두 결이 어떤 비율로 섞여 어디서 만나는지를 읽는 판입니다.
본인의 여덟 글자에는 볕과 그늘이 어떤 비율로 앉아 있습니까? 드러내는 글자가 많은지 갈무리하는 글자가 많은지, 그 저울이 지금의 성미와 어디서 겹치는지 한 번쯤 제 눈으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덕의 두 비탈을 다 보고 나면, 좋은 사주와 나쁜 사주를 묻던 물음 자체가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